초저금리 역설... 소비하라고 내렸는데, 저축만 늘어

    입력 : 2016.08.10 09:50

    유럽·일본, '마이너스 금리' 역효과… 우리나라도 비슷한 양상


    90년대 일본식 '저축의 역설' 확산… 불황때 저축 늘면 경기회복 지체
    "미래 불안감 줄이는 노력 더해야"


    가계가 돈을 쓰게 하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한 유럽 국가들과 일본에서 오히려 가계의 저축이 늘어나는 '역풍'이 불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주는 대신 수수료를 부과하는 정책이다. 예금을 하기보다 돈을 쓰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금리를 낮춰 경기를 부양하다 보니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나왔다. 2014년부터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들),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과 일본이 순차적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한 나라들의 가계 저축률이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다. 소비가 늘어나기는커녕 저축이 늘어나는 의외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불황기 때 저축이 늘면 돈이 은행에만 잠겨 있으면서 경기 회복은 멀어지는 것이어서 저축률 상승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日 '마이너스 금리'에도 저축 늘어


    9일 OECD 자료에 따르면 작년 독일의 가계 저축률은 2010년 이후 최고인 9.7%로 올랐다. 가계 저축률은 가계가 쓸 수 있는 돈인 가처분소득 중 저축한 돈의 비율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14년 6월 예치금에 대해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올해 2월에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한 일본도 저축률이 높아지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행이 집계한 올해 1분기 일본 가구의 현금과 저축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 불어났다. 일본의 저축률은 지난해 1.3%에서 올해 2.1%(OECD 추산)로 올라갈 전망이다. 덴마크, 스위스, 스웨덴의 가계 저축률도 각각 올해 8.1%, 20.1%, 16.5%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첫째, 저물가로 인해 소비자들의 보유 현금이 늘어나 저축할 여력이 생겼다. 둘째, 고령화로 인해 늘어난 노인들이 저축을 선호한다. 셋째,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의 취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소비자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을 더 키웠다는 것이다. 임형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더 많은 돈을 빌리고 쓰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거나 불확실성이 크면 오히려 지갑을 닫는다"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이제까지 없었던 정책이라 오히려 불안감을 키우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식 '저축의 역설', 전 세계로 확산


    경제학자 케인스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와중에 '불황 때 저축이 늘어나면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저축의 역설'을 주장했다. 개인적으로야 돈을 아끼는 게 불황을 견디는 방법일 수 있으나, 모든 소비자들이 저축을 늘리면 경제 전체적으론 수요가 부족해 불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논리다.


    저축의 역설은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실제로 나타났다. 일본은행이 1990년 연 6.0%인 금리를 1995년 연 0.5%로 낮췄지만, 가계 저축률은 10%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일본 정부가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세금을 깎아주면서 온라인으로 입금해 주자 돈을 빼 쓰지 않고, 은행 계좌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일본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1998년 국민 한 사람당 3만~10만엔의 상품권을 나눠주면서 6개월 안에 본인이 쓰지 않으면 무효로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경기 회복을 위해 푼 돈이 다시 저축되면서 일본은 '20년 불황'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시 일본에선 저출산이 시작되는 동시에 이자가 낮아지면서 노후 자금 마련에 대한 불안으로 돈을 비축해두는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기준 금리가 역사상 최저 수준(연 1.25%)으로 떨어졌지만, 가계 저축률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우리나라 가계 저축률은 2011년 3.7%에서 지난해 8.8%(OECD 기준)까지 올랐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중앙은행과 정부가 앞으로의 정책에 대한 계획을 보다 투명하게 밝히는 등 시장의 불안감을 줄여주기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