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제2 실리콘밸리' 비결은... 성과 조급증 버린 인내심

    입력 : 2016.08.10 09:40

    [美 산학연구단지 RTP]


    듀크대 등 지역내 3개 대학 연결, 삼각지대 중심에 연구단지 조성
    한 달에 300달러로 사무실 임대… 고용인원 10명 미만 회사가 60%
    매년 기업에 6억달러 稅감면 등 수십년간 성과를 떠나 투자지원


    '우리는 발견의 기쁨을 공유하며 협력의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州) 산학 연구단지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RTP)'에 들어서자 이런 팻말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지역 대학과 기업의 유기적 파트너십으로 미국에서 '제2의 실리콘밸리'란 타이틀을 거머쥔 RTP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RTP가 각지의 이공계 전문가들을 끌어들인 덕분에 노스캐롤라이나 주도(州都)인 롤리(Raleigh)는 2014년 미국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 7위에 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리서치 파크의 절반이 실패하고, 살아남았다 해도 유지·관리를 못 해 비즈니스 파크로 전환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RTP는 상당히 고무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신생 스타트업의 산실


    이날 찾아간 RTP 개방형 공동 작업공간 '프런티어(Frontier)관' 1층은 오전인데도 활기가 넘쳤다. 2014년 지어져 요즘 가장 '핫'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다. 프런티어관 관리인 제이컵(38)은 "노스캐롤라이나엔 골프 티(Tee)와 나무(Tree), 그리고 PhD(박사)가 많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연구원은 "애완견 동반이 가능하고 눕거나 서서 편하게 일할 수 있어 대학 연구실을 놔두고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명함에 희망하는 연구 파트너 조건을 적어 박스에 넣어두면 RTP가 1주일 내로 연결해주기도 한다.


    산학 연구단지인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에는 애완견을 데리고 올 수도 있고 의자에 눕거나 서서 일할 수도 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프런티어관'에서 연구원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김은정 기자


    신생 스타트업들이 입주한 나머지 2개 층은 '꿈의 인큐베이터'다. 2평(6.6㎡) 남짓한 공간에 컴퓨터 하나만 갖고도 일하는 '1인 기업'이 30여개. 이 같은 초소형 사무실은 월 300달러(약 33만원)면 빌릴 수 있고 가구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을 개발하려 한다는 듀크대 졸업생 헤인스(31)는 "월 단위로 임대 계약을 갱신하는 형태여서 자금력이 약한 우리 같은 스타트업도 부담없이 입주할 수 있다"고 했다.


    스타트업이 안정적 궤도에 들어서면 알렉산드리아 이노베이션 센터 등 RTP 내 4개의 '액셀러레이터 센터'가 맞춤형 컨설팅을 해주고 도약을 돕는다. RTP 입주 기업 220개 가운데엔 IBM과 시스코, 글락소스미스클라인 같은 대기업도 있지만 비중은 1%에 불과하다. 대신 고용 인원 10명 미만 회사(59%)가 훨씬 많다. 지난해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의 벤처 투자가 전년 대비 93% 늘었을 정도로 투자자들의 관심도 뜨겁다.


    ◇고급 인력 풀 만들어 50여년간 기업 유치


    RTP는 탄생부터 산학 협력이 근간이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가구, 섬유, 담배 등 전통 제조업이 강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전통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새로운 살길을 찾아나섰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는 고급 인력을 배출하는 지역 내 연구중심대학 3곳(듀크대, 노스캐롤라이나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지역 경제를 살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대학들이 있는 롤리, 더럼(Durham), 채플 힐(Chapel Hill)을 연결하는 삼각지대의 중심에 1959년 RTP를 조성했다. 차로 15분이면 세 곳의 다운타운에 진입할 수 있고 국제공항과는 10분 거리인 교통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설립 초반엔 전통 제조업 지역이란 이미지가 강해 테크놀로지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주정부와 지역 리더들은 도리어 매년 부지를 넓혔다. RTP 이사회 간부들은 3개 대학에서 진행 중인 연구와 기업들의 사업을 철저히 분석해 전국을 돌며 기업 맞춤형 마케팅도 벌였다.


    1965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였던 테리 샌퍼드가 친분이 있던 케네디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해 워싱턴 DC를 제치고 환경보건과학연구소를 유치한 게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IBM이 입주 계약을 맺었고 다른 기업들도 하나둘씩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RTP는 산학 공동연구, 투자, 개발 등 세부 기능별로 지원 기관을 만들어 친기업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RTP 홍보 매니저 마크 레이신은 "요즘은 2008년 지은 최고급 호텔 수준의 RTP 콘퍼런스룸을 청소비와 인건비 정도만 받고 저렴하게 대여함으로써 대학과 기업의 상호 협력을 촉진하고 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 수준의 생활을 싼 물가에 누릴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히고 있다. RTP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아 삶의 여유가 있으면서 2시간 거리에 산과 바다가 모두 있다.


    ◇RTP "산학단지 성공엔 인내심이 가장 중요"


    RTP 재단의 밥 지올라스 회장은 산학 연구 클러스터의 성공 비결로 '인내'와 '변화'를 꼽았다. 지올라스 회장은 "수십년간 성과를 떠나 투자 지원을 계속해 나갈 강력한 리더십과 지역 사회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정부가 지방에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연구단지의 경우 다른 환경이 갖춰지지 않을 때 입주 기업이 '고립'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밥 회장은 "멀리 가지 않고도 연구와 투자 유치, 자문 등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기반을 구축하는 게 관건"이라며 "그때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하라"고 했다.


    지올라스 회장은 또 연구단지의 콘셉트를 한 가지로 좁히지 말고 다양화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바이오 테크 전문, 신약 개발 전문 등으로 영역을 좁히기보다는 복합 과학단지로 범주를 넓혀 많은 기업을 끌어안는 게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비결"이라고 했다. RTP는 1980년엔 IT 연구소인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센터를 설립하고 1990년엔 퍼스트 플라이트 벤처 센터를 만드는 등 새로운 연구 트렌드에 따라 지원기관을 신설했다. 그 영향으로 현재 RTP 내 입주 기업의 업종은 바이오테크 분야(45%)와 정보기술(20%), 서비스업(11%) 등 매우 다양하다.


    RTP 재단은 지난해 1700만달러를 투자해 레스토랑과 병원, 쇼핑시설 등 복합 공간을 만들겠다는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 역시 삶의 질을 중시하는 35세 미만 밀레니얼 세대 연구원들을 겨냥한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 경제개발조합 CEO 크리스토퍼 정은 "RTP로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매년 6억달러(약 6600억원)의 세금 감면 유인책을 쓰고 있지만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라며 "산학 연구단지를 성공시키기 위한 대학과 기업, 정부 간 끈끈한 파트너십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