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출포족 늘고 편한 일만 찾는 공무원들

    입력 : 2016.08.03 09:14

    [가라앉는 관료사회] [中] 젊은 공무원들 업무 의욕 저하


    - "장·차관 안 해도 상관없다"
    행시 최상위권들 기재부 기피
    부처 내에서도 핵심 室·局 대신 여유 있고 간섭 덜한 부서 몰려
    - 가정 최우선 '생활형 공무원들'
    서울 자주 가는 보직엔 손사래
    간부들 목요일에 서울로 떠나면 세종청사 사실상 '주 4일 근무'


    올 초 기획재정부 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무관 인사를 앞두고 인사 대상자들로부터 희망 부서를 제출받았는데 장·차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경제정책국이 실·국별 선호도에서 5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를 이끈 간판스타를 대거 배출한 부서의 인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업무 강도가 높다는 게 외면받는 이유다. 경제정책국은 선호도에서 국제금융국과 세제실은 물론이고, 국고국에도 밀렸다. 국고국은 행정고시 출신들이 기피해 비고시 출신들이 주로 근무하던 곳이다. 기재부 고위 간부는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본말이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젊은 공무원들이 편한 보직을 찾는 기류가 뚜렷해지고 있다. '가늘고 길게 가자'는 풍조가 퍼지면서 핵심 부서나 승진 코스가 아니더라도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한 곳으로 대거 몰린다. 이런 현상은 관료 사회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세종시로 이전한 이후 유유자적한 '시골 생활'을 하다 보니 업무에 대한 열의가 한층 떨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근 줄어든 세종청사


    세종청사로 이전한 이후에는 과천청사 시절에 비해 밤에 불 꺼진 사무실이 크게 늘었다. 물론 여전히 밤늦게까지 일하는 공무원도 많지만 퇴근 시간이 훨씬 빨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간부들이 서울에 출장 중인 경우가 많아 눈치 덜 보고 귀가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의 한 사무관은 "아내가 세종으로 이사 온 이후 적응에 힘들어해서 일찍 퇴근한다"며 "밤낮없이 일해도 예전 선배들만큼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없는데 뭐하러 몸 바쳐 일하겠느냐"고 했다.


    젊은 공무원들이 일 적고 윗사람의 간섭을 덜 받는 부처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부처의 '큰형' 격인 기재부에서 "일이 적은 곳으로 가고 싶다"며 다른 부처로 옮기는 사무관들이 매년 여러 명 나온다. 자부심 강한 기재부 간부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올해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자 중 성적으로 상위 10명 가운데 기재부는 불과 2명만 선택했다. 2, 3, 5등을 비롯해 상위 10명 중 4명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선택한 것을 눈여겨보는 공무원이 많다. 서울에 있는 금융위원회를 갈 수도 있지만 굳이 세종의 공정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한때 세종 근무를 기피해 금융위에 최상위권이 몰렸는데 금융위가 일을 많이 시킨다는 소문이 나니까 이제는 사무관에게 재량이 많은 공정위로 몰린다"고 했다.


    ◇세종청사 점령한 '출포족'


    승진과 출세를 그려볼 수 있는 부서도 몸이 고되면 무조건 피하는 현상도 뚜렷하다. 이른바 '출포족(출세 포기한 사람)'이 세종청사를 장악했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기재부에서는 1차관은 경제정책국 출신이, 2차관은 예산실 출신이 맡도록 고정돼 있다. 하지만 정작 사무관들은 장·차관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국제금융국이나 세제실에 서로 가고 싶어 한다.


    최고 인기 부서인 국제금융국은 해외 근무 기회를 잡는 데 유리하고 업무 부담이 덜하다는 이유로 인기 상한가다. 국제금융국의 한 사무관은 "장·차관 그런 거 안 해도 상관없다. 우선 국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했다. 세제실도 비슷하다. 세제실의 한 과장은 "퇴직 후 세무·회계법인에 가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데다, 매년 세제를 조금씩 고치는 업무가 반복되니까 익숙해지면 일이 편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외부에서는 예산실을 막강한 부서로 보지만 기재부 안에서는 일찍 퇴근 못 한다는 이유로 사무관들한테 영 인기가 없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예전 같았으면 왜 나를 이곳으로 발령 내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항의했을 법한 부서에 사무관들이 대거 몰린다"고 했다.


    ◇청와대 근무마저 기피


    엘리트 코스로 꼽히던 보직도 이제는 '서울'과 연관이 되면 기피 대상이다. 서울―세종을 오가기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원래 중앙부처 과장들은 서로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 세종으로 이사 온 과장들이 적지 않아 사정이 달라졌다. 경제부처 관계자들은 "청와대에 가라고 하면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내려와서 가기가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어서 세상이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고 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예전에는 국회를 오가는 예산 담당자나 국회 연락관을 서로 맡으려고 청탁까지 했는데, 요즘은 국장들이 삼고초려를 해야 겨우 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세종청사는 목요일 오후만 되면 '주말 분위기'가 난다. 국장·과장들이 서울에서 업무를 보러 목요일부터 세종청사를 비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사무관들이 사실상 '주 4일' 근무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위의 B과장은 "한마디로 세종시는 사무관의 천국"이라며 "상사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서울에 있는 건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데, 근무가 느슨한 건 결국은 사무관들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