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멀어지는 '갈라파고스 관료들'

    입력 : 2016.08.02 09:50

    [가라앉는 관료사회] [上]


    서울에 '카톡 報告' 날리고… 집에 가서 점심먹는 '세종섬' 관료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두뇌' 역할 하던 사람들이 집단 무기력증
    세종시로 옮긴 후 민간과 단절 갈수록 심각 "이젠 편한게 익숙"


    - "엘리트? 시골 공무원 된 느낌"
    세종시 살만해지니 서울行 '뚝'
    민간 전문가·친구도 안 만나고 자신들만의 '편한 세계'에 안주
    현실감각 떨어져 정책 헛발질도
    - 관료사회 상하 소통도 단절
    서울 간 상관과 만날 기회 줄어
    큰 그림 못보니 정책의 맥 끊기고 젊은 공무원 전체의 역량 저하로


    목요일인 지난 28일 오후 3시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휴게실에는 사무관으로 보이는 젊은 공무원 두 명이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둔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삼삼오오 옥상 정원에 올라가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날 오후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최상목 1차관, 송언석 2차관 등 고위직들은 모두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다. 국장급들도 상당수가 서울 일정을 소화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 다른 부처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날 오후 6시가 되자마자 퇴근해서 농구 등 취미 활동에 몰두하는 젊은 공무원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이런 풍경은 세종청사에는 흔한 일이다. 이날뿐 아니라 거의 매주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 간부 대부분이 청와대나 국회 업무를 보느라 청사를 비운다. 기재부의 5년 차 사무관은 "목요일 오후부터 주말 분위기가 난다"며 "간부들이 없을 때 자리를 비우거나 인터넷 쇼핑이나 웹툰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발전을 앞장서 이끌어왔던 중앙부처 관료들이 주저앉고 있다. 의욕을 상실하고, 과거보다 힘이 세진 국회에 밀려 위축된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젊은 공무원들은 어느새 살 만해진 세종시에 안주하고 있고,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는 옛 선배 관료들 이야기는 전설로나 여겨진다. 이직(離職)이나 유학을 타진하며 인생의 주판알만 튕기는 젊은 공무원도 늘고 있다.


    특히 세종시로 이사온 이후 관료 사회의 무기력증은 빠른 속도로 깊어지고 있다. 세종청사에 입주한 지 5년째. '육지의 섬'같은 세종시에서 '갈라파고스화(化)'한 채 머물다 보니 관료들의 눈과 귀가 가려져 시대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우려다. 서울과 세종 간 거리만큼 관료 개개인의 네트워크가 약해지고, 현실 파악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복(公僕)인 공무원의 능력 저하는 국민의 손실이자,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며 "공무원들이 민간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임 경제부처인 기획재정부는 경제부총리가 격주로 세종청사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여는 게 원칙이다. 주요 간부들이 모여 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다. 하지만 유일호 부총리는 5월 24일을 마지막으로 두 달 넘게 세종청사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지 못했다. 국회나 청와대 일정, 해외 출장 등으로 세종청사에 좀처럼 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재부 간부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관료 사회 내부에서 정책의 방향과 큰 그림을 공유하는 기회가 줄어들다보니 종종 정책의 '맥(脈)'이 끊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카카오톡'으로 보고하는 심부름꾼 같은 사무관들


    원래 중앙부처에서는 국장, 과장이 사무관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놓고 '1대1 과외' 식으로 교육하는 게 오랜 훈련 방식이었다. 요즘은 사무관들이 카카오톡이나 이메일로 서울에 있는 국·과장들에게 보고서를 보내면, 즉석에서 받아 고친 뒤 청와대나 국회에 보고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 부처 한 간부는 "카톡으로 사무관이 보낸 보고서를 보면 한숨 나오는 수준이지만 바쁘니까 그냥 내가 고쳐서 상부에 보고한다"고 말했다.


    예전 과천청사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당시에는 국·과장이 장·차관에게 보고할 때 사무관도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장관이 정책을 챙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젊은 공무원들도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제 관계 장관 회의 등에서 국정 흐름을 엿볼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세종청사에서는 직속 상관인 국장을 만나는 일조차 뜸해지면서 이런 기회는 아예 사라졌다. 기재부의 A국장은 "과장이나 사무관들이 맥락을 모른 채 지시 사항을 단편적으로 하달받다 보니 능력과 의욕 모두 떨어졌다"며 "실제 목표와 동떨어지게 업무를 수행해 일을 두 번 세 번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점심 먹을 사람 없어 집에서 먹기도


    행정고시 출신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 '지방 공무원화'되는 현상도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제 부처에서 일하는 30대 중반 B사무관은 요즘 세종청사에서 10분 거리인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B씨는 "세종에서는 같은 공무원 말고는 만날 사람이 없어서 차라리 집에 가서 아내랑 밥 먹는 게 낫다"고 했다.


    또 세종시의 생활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살 만해지다 보니 어느새 서울 가기가 귀찮아져서 좀처럼 세종을 벗어나지 않는 공무원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세종시에 사는 사무관들 사이에서는 "시골에 틀어박혀 SNS로만 바깥세상을 접하는 것 같아 불안하다"는 말이 돈다. 만날 사람이 없어서 젊은 공무원들끼리 술자리를 벌이고 상사 험담이나 연애 이야기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는 한탄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고시 출신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도 모자랄 판에 시골 공무원들이랑 삶의 패턴이 같아졌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


    공직 생활 25년이 된 고위 관료는 "지금의 젊은 공무원들이 간부가 됐을 때 외환 위기처럼 큰 상황이 닥친다면 이를 수습하고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세종청사로 이전한 후 사무관들의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은 국가적 위험이 커지는 것"이라고 했다.


    ◇민간과 교류가 끊겨버린 관료 사회


    관료 사회와 민간의 단절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기획재정부 C과장은 과천청사 근무 시절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대학 동창, 민간 전문가, 국회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조찬 간담회 등에도 참석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민간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 마주치기도 벅차다. C과장은 "세종에 내려온 이후로 '육지의 섬'에 갇힌 바보가 된 느낌"이라며 "세종과 서울을 왕복하는 데 5~6시간 걸리다 보니 이제는 움직일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주요 부처 간부들은 "서울 오가는 걸 귀찮아하는 세종 거주 사무관들에게 '서울에 가서 세미나에 참석해보라'고 권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행정학 전공인 서울의 한 대학교수는 "예전에는 정책을 만들 때 사무관이나 과장들이 교수나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많이 물었는데 세종으로 내려간 이후로는 만나는 횟수가 줄더니 이제는 통화마저 뜸해졌다"고 했다.


    중앙 부처가 민간과 격리되면서 정책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올 하반기 최대 이슈인 조선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이 부실 처리 등 응급 수술을 하는 동안, 세종에 있는 산자부는 업계 개편 등을 논의했어야 하는데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환경부는 엉뚱하게도 고등어를 미세 먼지 주범으로 지목해 혼란을 야기했다. 시장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니 헛발질만 하는 것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수요자 중심 정책을 위해서는 민간과 정부가 세부 사항까지 조율해야 하는데, 세종시로 행정 부처가 이주하면서 민관 교류가 크게 줄어 오히려 간극만 더 커지고 있다"고 했다.


    ☞갈라파고스 현상


    세계시장과 단절·고립돼 결국 낙오하는 현상을 말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전자산업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1835년 찰스 다윈이 방문해 진화론의 실마리를 얻은 에콰도르 서쪽 1000㎞ 해상 외딴섬 갈라파고스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