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대신 '스마트폰 지갑'... 日 핀테크시장 1년새 2배로

    입력 : 2016.06.01 09:20

    [일본의 핀테크 열풍]


    - 2020년 시장 규모 567억엔 전망
    은행 수수료 비싸고 문턱 높아… 스마트폰 익숙한 젊은이들, 모바일 결제·송금 늘어


    - 규제 풀어 '핀테크 붐' 지원
    금융지주사가 자회사 만들어 핀테크 시장 진출할 수 있게 돼
    "IT 인력 확보하는 게 급선무"


    일본 도쿄에서 피트니스 강사로 일하는 야마시로 유카(32)씨는 요즘 친구와 만날 때 현금 없이 외출한다. 하루 3만엔 이하 금액은 수수료 없이 송금이 가능한 스마트폰 결제 서비스앱 벤모(Venmo) 덕분이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밥값을 각자 계산할 때 이 앱을 사용하면 클릭 몇 번으로 자기 몫의 돈을 친구에게 보낼 수 있다. 유카씨는 "스마트폰으로 돈을 지불할 수 있게 되면서 무겁게 동전을 들고 다니거나 계산 때마다 잔돈을 바꿔야 하는 불편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 대신 전업 주부를 시작한 노가미 타케시(41)씨는 지난 3월에 각종 가족 행사 때문에 지출이 평소보다 5만엔(약 50만원)가량 늘었다. 하지만 가계부 앱 자이무(Zaim·일본어로 '재무'라는 뜻)를 이용하면서 바로 씀씀이를 줄일 수 있었다. 이 앱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영수증을 찍으면 자동으로 인식해 금액을 저장해 월별 입출금 내역을 그래프로 정리해준다. 이 '스마트폰 가계부'는 얼마나 돈을 썼고, 잔고가 어느 정도인지 재무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일본 내에서 500만명 이상이 사용할 정도로 인기다.


    핀테크가 일본 사회를 바꿔나가고 있다. 핀테크(FinTech)는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모바일 결제, 송금, 자산 관리를 제공하는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말한다. 일본에선 최근 2·3년 사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20~30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현금 위주의 결제 문화를 바꾸고 있다. 일일이 동전을 세어가며 밥값을 치르던 모습이 사라지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지불하는 금융 거래가 늘고 있는 것이다.


    ◇"IT는 늦었지만…" 커지는 일본 핀테크 시장


    일본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의 핀테크 시장은 지난해 33억9400만엔(약363억원)이었다. 올해는 그 두 배가량인 65억7100만엔을 기록할 전망이고,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에는 567억8700만엔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컨설팅업체 액센츄어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둘째로 큰 전자결제 시장 규모를 자랑한다.


    글로벌 결제 업체 페이팔이 도쿄 하라주쿠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결제하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일본에선 최근 2~3년 새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20~30대를 중심으로 핀테크가 빠르게 확산해 현금 위주의 결제 문화가 바뀌고 있다. /블룸버그


    한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IT 인프라 구축이 늦었던 일본에서 핀테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기존 금융 서비스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신용카드 만드는 데 2주 넘게 걸리고, 은행의 수수료는 높은 데다, 지나치게 현금을 중시하는 결제 문화 때문에 일본 소비자들에게 금융 기관의 문턱이 높은 편이다. 이에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핀테크 수요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일본의 핀테크 바람은 은행 등 전통 금융업계가 아닌 IT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빠른 신용 조회와 보안 업무 등 IT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IT 업체들의 진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IT 기업인 라인(LINE) 재팬은 최근 모바일 결제앱인 라인페이(LINE Pay)를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라인 앱을 통해 이용자 간에 수수료 없이 송금이 가능하고 소액 결제도 할 수 있다. 이용자 6800만명을 보유한 라인은 일본 5개 주요 은행과 제휴해 라인페이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야후 재팬은 각종 공과금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지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에선 아직도 은행이나 편의점에서 공과금을 납부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시장조사기관 IDC재팬의 이치무라 히토시 연구원은 "지금까지의 금융 서비스는 시중 은행에 대한 의존도가 컸지만, 온라인 금융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이제는 손바닥 안에서 모든 금융 거래가 가능해졌다"며 "최근의 핀테크 성장을 두고 금융계에선 '지금 은행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사표를 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비장한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핀테크는 저금리 시대의 새로운 자산 운용 방편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일본은 지난 2월 일본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0.1%로 정하며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진입했다.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도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수익률을 지키기 위해 수수료 부담이 적은 인터넷은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핀테크 시장 선점 위해 규제 없애는 日


    일본 금융 전문 매체인 주 온라인(ZUU Online)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핀테크 시장 규모가 지난해 45억달러(약 5조원)를 기록했다. 여기에 인도, 싱가포르 등 신흥 시장이 가세하면서 향후 10년 안에 핀테크 시장의 중심이 미국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 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핀테크가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자 일본 정부는 오랜 규제를 풀어가면서 '핀테크 붐'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핀테크는 단순히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상품을 결제하는 것뿐 아니라 자산 운용과 대출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금융 서비스가 이뤄지기 때문에 기존 금융 규제와 자주 충돌한다. 중국 알리바바가 만든 알리페이의 소액융자 서비스를 '규제 왕국' 일본에서 하려면 선불카드법, 대금업법, 자금결제법 등 여러 법에 걸린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 혁신적인 핀테크 기업이 나오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아온 이유다.


    이런 지적이 나오자 일본 금융청은 지난해 금융지주회사 산하에 전자상거래·스마트폰 결제 사업을 하는 자회사를 둘 수 있도록 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는 1998년 일본이 금융 시스템 개혁을 위한 '금융 빅뱅'을 실시한 지 17년 만의 대대적인 규제 완화다. 이에 따라 도쿄미쓰비시은행 등 일본의 3대 대형 은행들은 자회사를 별도로 설립해 핀테크 기술을 사용하는 전자 상거래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일본 금융계에선 은행이 IT 벤처 기업과 공동 출자해 자회사를 설립·운영하면 소비자 선택 폭이 커져 수수료 인하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핀테크 활성화를 위해 규제 개혁의 칼을 뽑았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아직 미국과 유럽에 비해 IT 인재 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 제조업 중심에서 IT 분야로 바뀌고 있지만, 미국, 유럽에 비하면 일본에는 핀테크 사업의 핵심 요소인 IT 인재들이 부족하다"며 "안정적인 핀테크 사업을 위해선 고급 IT 인력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