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한시법, 20년 일터를 빼앗다

    입력 : 2016.05.20 09:37

    [워커힐 면세점 폐점… 파견 직원 700명의 눈물]


    - 생업 잃은 파견 직원들
    "전문 판매직이란 자부심 무너져… 많은 동료들 정신과 치료 받기도"
    "25년 경력, 신규면세점에 이력서… 나이만 보는지 아무 연락 없어"
    "재벌 특혜 없앤다더니 왜 파견직 일자리만 없애나"


    "멀쩡한 면세점을 문 닫게 한 정부 정책의 가장 큰 희생자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바로 우리 파견 직원들입니다."


    SK네트웍스가 운영하는 워커힐 면세점에서 수입 화장품 판촉 사원으로 일했던 한 40대 여성은 지난 16일 폐점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대학 전공인 일본어를 살려 졸업과 동시에 면세점 일을 시작, 20년 청춘을 바쳤다는 그는 "6개월 전부터 분하고 억울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동료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문 판매직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텨온 세월이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질 줄 몰랐어요. 돌이켜보니 저는 소모품에 불과했어요."


    SK네트웍스는 지난해 11월 모든 면세점 사업권을 5년마다 원점에서 심사하는 '5년 한시법'이 적용된 면세점 심사에서 워커힐 면세점 사업권을 잃었다. 이에 따라 1992년부터 24년간 운영하던 매장은 지난 16일 정문 셔터를 내리고 폐점했다. 워커힐 면세점 직원은 정규직과 협력업체 파견 직원을 합해 총 900여 명. 정규직 190명 중 신세계·두산·SM 등 새 면세점으로 떠난 90명을 제외한 100여 명에 대해서는 SK네트웍스가 100% 고용 보장을 약속했다.


    17일 셔터가 내려진 서울 광장동 워커힐 면세점. /김연정 객원기자


    하지만 입점 업체 소속인 파견 직원 700여 명은 공중에 붕 떴다. 특히 워커힐 면세점에만 매장을 낸 중소 업체 직원 등 파견 직원 상당수는 새 일터를 구하기 위해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할 처지다. 지난달 정부가 올 연말까지 서울 시내 면세점 4곳을 더 내기로 했지만, 어느 면세점이 사업권을 따게 될지, 실직한 파견 직원들의 재취업이 이뤄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실직한 25년 경력 파견직, 5곳 지원했지만 서류 심사서 탈락


    유럽 패딩 A의류업체 소속 파견 직원 윤모(48)씨는 면세점 경력 25년 차 베테랑이다. 동화·롯데 면세점을 거쳐 2013년부터 워커힐 면세점에서 근무했다. 연봉 4000만원을 받았지만 폐점과 동시에 실직자가 됐다. A사 관계자는 "다른 면세점에 입점하지 못해 당신을 받아줄 자리가 없다"고 했다. 생활비와 대학생 남매의 등록금 등 한 푼이 급한 윤씨는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면접도 못 봤다. 그는 "새 면세점 등 5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경력을 제쳐둔 채 나이만 보고 평가하는지 아무 연락이 없다"며 "프로라고 자부하며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런 것이라 생각하니 참담하다"고 말했다.


    직장을 잃은 파견 직원들은 "한 국회의원이 추진한 '악법(惡法)'이 우리가 피땀 흘려 키운 일터를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울먹였다. 의류 업체 소속으로 워커힐 면세점에 파견돼 일하던 경력 10년 차의 30대 여성 판매 직원은 "'5년 한시법'을 만들어 내 직장을 빼앗은 국회의원 이름을 절대 잊지 않겠다"며 "재벌 특혜 없앤다더니, 왜 힘없는 파견직 일자리만 없애는가"라고 말했다.


    한 남성 파견 직원은 "회사에선 올 연말에 워커힐 면세점이 재개장하면 꼭 부르겠다고 하지만 아예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다"며 "솔직히 사업권을 딴다는 보장이 없지 않으냐"고 했다.


    ◇매장 옮기며 떠돌이 생활, 고용 조건 더 나빠져


    파견 직원들은 작년 말 입찰 탈락 이후 면세점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던 SK네트웍스의 행보에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SK네트웍스는 폐점 계획 등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직원들의 입을 단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훈 SK네트웍스 사장은 폐점일인 16일 사내 방송을 통해 "반드시 추가되는 사업권을 따내 구성원의 고용 안정과 관광산업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고, 회사 측은 남아 있는 정규직 100여 명에게 현 수준 급여를 준다고 밝혔다. 파견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일부 파견 직원은 소속 업체가 다른 일을 맡겨도 안정성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국산 화장품 매장 판촉 사원 최모(45)씨는 앞으로 다른 면세점에서 운영하는 본사 매장을 옮겨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한다. 다음 달 말까지 폐점을 앞둔 롯데 면세점 월드타워점 매장에서 일하고, 그 뒤에는 두산 면세점 매장으로 옮겨야 한다.


    한 10년 차 파견 직원은 "고용 조건이나 급여 수준이 떨어지는 일자리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됐다'고 말하는 동료 사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법 개정 서둘러 정책 실패 반복 끝내야"


    이런 사태는 오는 6월 말 롯데 면세점 월드타워점이 문을 닫을 때 반복된다. 정부는 최근 면세점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를 운영하며 사업권 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하는 등 5년 한시법'을 바꾸는 작업에 돌입했지만, 이것도 국회를 통과해야 가능하다. 20대 국회가 여소야대 상황임을 감안하면 법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정재완 한남대 교수는 "우리 면세점 정책은 세계 경쟁력뿐만 아니라 직원들 고용 안정성까지 심각하게 해친 대표적 실패 사례"라며 "사업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근본적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