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아이디어 베껴 사업 가로챈 정부부처

    입력 : 2016.05.11 09:52

    금감원의 '주소변경 서비스' 등 국내업체 사업 무단으로 복제
    경찰청이 사기 방지 앱 따라해도… 벤처는 속수무책


    - 사기계좌 조회 첫선 보인 '더치트'
    경찰청서 똑같은 서비스 내놔…
    더치트 "어렵게 일군 시장인데", 경찰청 "민간은 신뢰성 떨어져"


    - "정부가 창의적 기업가 막는 것"
    서울시교육청도 앱 베끼기 논란, 자금력·규제권 쥔 정부 못 이겨
    기술 제휴도 특혜 논란에 막혀


    금융감독원은 올해 1월부터 '금융거래 수반 주소 일괄 변경 시스템'을 시행 중이다. 개인이 집을 이사하거나 직장을 옮길 때 카드·보험·은행 등 금융사에 등록된 주소를 한 번만 변경 신청하면 나머지 업체들의 주소도 옮겨준다. 금감원은 "6월부터는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다"면서 "주소를 이전하지 못해 소비자들이 겪는 불편과 업체들이 내야 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라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국내 중소기업 '짚코드'가 지난 2000년 선보인 '우편물 주소 변경 서비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서비스는 지난 2004년부터 KT와 협력, 'KT무빙'이란 이름으로 제공되고 있다. 사용자가 홈페이지에 접속해 변경된 주소를 입력하면 나머지 제휴 업체들의 우편물 주소도 한꺼번에 바꿔 주는 똑같은 서비스를 해왔다. KT무빙은 금융업체와 백화점·대형 마트 등 유통업체, 이동통신사들과 제휴를 맺고 일괄적으로 주소지를 바꿔주는 서비스를 해왔다. 지금까지 누적 사용자가 380만명이나 된다. 하지만 금감원이 똑같은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사실상 사업을 접을 위기에 처했다.


    짚코드의 나종민 대표는 "그동안 사용자에겐 무료로 서비스하면서 제휴 기업에서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렸지만 앞으로 어떤 금융업체가 수수료까지 내가면서 우리와 제휴하겠느냐"며 "이미 몇몇 업체가 제휴 중단을 통보해왔다"고 말했다.


    한국 산업의 고질적 병폐(病弊)는 대기업이 벤처·중소기업의 기술과 서비스를 무단으로 베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대국민 서비스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각 부처는 민간의 서비스·앱(응용 프로그램) 등을 무단으로 베끼는 것이다. 중소·벤처업계에서는 "정부가 한쪽에선 '개방·소통·공유·협력'을 내세우며 다양한 지원책을 쏟아내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중소기업의 사업을 그대로 복제해 내놓고 있다"고 비판한다.


    ◇경찰청·교육청 등 분야 막론한 베끼기


    경찰청은 인터넷 카페와 커뮤니티 등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기 거래를 예방하기 위해 2010년부터 '사이버캅'이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PC·스마트폰에서 거래할 사람의 은행 계좌번호나 전화번호를 검색하면 사기 거래나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엔 이 서비스를 기업·금융업체에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서비스 역시 지난 2006년 '더치트'라는 이름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이 먼저 선보인 것이다. 더치트는 자사 홈페이지에 등록된 사기 범죄 피해 사례를 데이터베이스(DB)로 쌓아 경찰청 사이버캅처럼 의심되는 계좌·전화번호를 검색해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이 서비스를 기업과 인터넷 카페·동호회에도 제공하고 있다. 더치트의 김화랑 대표는 "경찰청이 우리와 똑같은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어렵게 일궈낸 시장을 지키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적으로 협력 사업을 제의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지만 답변조차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의 산하 기관인 서울시 교육정보연구원이 2014년 출시한 '꿀박사'는 스타트업 '바풀'이 2년 앞서 개발한 '바로풀기'와 사실상 동일한 서비스다. 둘 다 학생들이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를 사진·동영상으로 촬영해 앱에 게시하면 다른 사용자가 풀이법을 알려준다. 이를 놓고 인터넷상에서 "정부가 스타트업의 사업을 배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논란이 일자 교육정보연구원 측은 바풀과 논의해 합의점을 찾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두 서비스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바풀의 이민희 대표는 "상생 방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만 오갔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베끼기 계속되면 창의적 기업 못 나와"


    정부는 대국민 서비스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금감원은 짚코드의 주소 이전 서비스를 베꼈다는 비판에 대해 "사업 영역도 다른 데다 짚코드는 일부 금융업체만 제휴해 전 국민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서 "국민 편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역시 "더치트에서 제공하는 사기 계좌 DB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사이버캅은 경찰에 실제 신고가 접수된 계좌번호를 제공해 신뢰도가 높지만, 더치트의 자체 DB는 일반 사용자들로부터 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비스 베끼기를 하는 풍토 속에서는 혁신적인 벤처기업이 생겨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누구보다 공정해야 할 정부가 중소·벤처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베끼면서 대기업의 베끼기를 규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경영학)는 "비즈니스 모델도 기술 못지않게 보호받아야 할 지적 재산"이라며 "막강한 자금과 규제 권한을 가진 정부가 벤처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창의적인 기업가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이정동 교수(산업공학)는 "정부가 벤처·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베끼는 것은 법적·도덕적인 측면 모두 문제가 있다"며 "정부는 민간사업을 지원하고 혁신을 진작시켜주는 정책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공공기관이 중소·벤처기업의 서비스와 기술에 적정한 대가를 치르고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정부는 '특정 기업과 일대 일로 제휴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만약 정부가 특정 업체와만 손잡고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특혜 논란이 일 것"이라고 말했다. 짚코드 나종민 대표는 "공무원들이 특혜 논란을 피하기 위해 벤처기업의 사업 모델을 베끼는 게 말이 되느냐"며 "특혜 논란만 피하면 벤처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