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상인 마음 붙잡다... 한국 기업의 '40년 우정'

    입력 : 2016.05.03 09:41

    [朴대통령 이란 방문]


    - 이란서 42조원 수주 청신호 비결
    대림산업·SK네트웍스, 경제 제재때 지사 꾸준히 운영
    35억달러 수주 현대엔지니어링, 제재 해제 2년 전부터 공들여
    11조원 공사 경쟁하던 현대·대우, 공동 수주로 초스피드 계약


    지난 4월 10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한 호텔. 대우건설과 현대건설 해외영업 담당 임원이 한곳에 모였다. 두 건설사 수주 담당 임직원들은 지난해 말부터 바흐만 제노 정유공사 프로젝트가 발주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란 정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공사비가 100억달러(약 11조4000억원) 규모여서 두 회사가 한 치도 양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회사가 경쟁만 벌이다가는 저가 수주로 손해를 보거나 중국·유럽 회사에 공사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1일(현지 시각) 이란 테헤란 에스피나스 호텔에서 열린 한식 홍보 행사에서 이란 현지 여성들이 직접 만든 김치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 자리에서 두 회사 수주 담당자들은 "한국 건설사끼리 경쟁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공사 금액도 크니 공동 수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본사에도 긴급 보고를 했다. 대우건설과 현대건설 담당 임원들은 2~3일 후 공동 수주에 전격 합의했다.


    ◇이란, 한국 건설사 40년간 신뢰 쌓아 높게 평가


    저유가 영향으로 중동 산유국들의 공사 발주가 급감하면서 고사(枯死) 직전에 몰렸던 한국 건설사들의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이란에서 한국 기업들이 371억달러(약 42조원) 규모의 각종 공사 수주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 건설사들이 이란과 인연을 맺은 것은 40여년 전이다. 대림산업이 가장 먼저 진출했다. 1975년 5월 이란 이스파한의 군용 시설 토목공사를 시행한 것. 대림산업이 1984년부터 6년간 진행한 캉간 가스 정제공장 건설 공사를 할 당시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1988년 이라크 전투기 8대가 공사 현장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난사해 13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다치는 참사가 터졌다. 그럼에도 대림산업은 "일단 맡은 공사를 책임지고 완수하겠다"며 공사를 끝까지 마쳤다. 그 결과 대림산업은 이스파한 철도 공사(49억달러)와 박티아리 댐·수력발전소(20억달러) 공사 계약을 수주할 예정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2년 전부터 세계 최대 규모(14조㎥)의 가스 매장 지대인 이란의 '사우스파(South Pars)'에서 12단계 확장 공사(35억달러)가 발주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 플랜트 담당 부서인 화공사업본부 직원들은 미국의 제재로 한국 기업인의 이란 방문이 자유롭지 않았던 기간 동안 30여 차례나 이란과 한국을 오가며 발주처와 접촉해 공사를 따냈다. 안정훈 이란 주재 국토교통관은 "이란 정부 측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 오랜 기간 신뢰를 쌓고 의리를 지켜온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 여성 혼자 있는 집 대상 '원격 가스 검침' 사업 추진


    SK네트웍스도 이란과 3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온 결과, 이란 국영 자동차 회사인 '사이파'와 자동차 부품 공급 MOU(양해각서)를 맺는 데 성공했다. SK네트웍스는 1984년 테헤란 지사(支社)를 설립한 뒤 '이란 핵(核)무기 개발 파동' 등 수차례 위기에도 문 닫지 않고 32년째 운영하고 있다. 1998년부터 19년째 이란에서 근무 중인 김관성 SK네트웍스 테헤란지사장은 "페르시아 상인이라고 불리는 이란 기업인들은 계산이 확실하지만, 인연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75년부터 테헤란 지사를 운영 중인 포스코대우는 이란광공업개발공사(IMIDRO)의 부두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포스코는 지난 2월 이란 국영 철강사인 PKP와 연산 160만t 규모 일관제철소 건설 합의각서(MOA)를 체결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은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한 원격 전력 제어 시스템과 원격 가스 검침 관련 시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이란에선 여성이 혼자 있는 집에 남성 검침원이 들어갈 수 없어 원격 검침에 관심이 많다"며 "이란의 독특한 문화가 한국 기업엔 기회인 셈"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양해각서… 넘어야 할 산 많아


    이번에 상당한 수주 성과를 거뒀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대부분 양해각서 수준이어서 법적 구속력이 없고 수주가 확정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이번 계약이 양해각서 수준이긴 하지만 유럽과 중국 일본 등이 이란에서 각종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시장을 선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대(對)이란 제재가 풀렸지만 달러화 거래가 불가능한 것도 걸림돌이다. 한국 기업이 이란에 수출할 경우 달러로 받지 못하고 이란 중앙은행이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에 예치한 계좌에서 원화로 바꿔서 받는다.


    게다가 이란 발주처에선 대규모 플랜트·토목공사에 대해 시공 회사가 자금을 조달해 올 것을 요구한다. 이란은 경제 제재 이후 재정 고갈로 인프라 공사 등을 집행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 등을 통해 250억달러 규모의 금융 지원 패키지를 만들어 우리 기업들의 이란 프로젝트 수주를 지원할 계획이다.


    김종국 해외건설협회 실장은 "이란에서 발주하는 공사 중에는 수의계약 형식도 제법 있어 수익성이 안정적인 프로젝트가 적지 않다"며 "수익성이 일정 수준 확보된 공사에 대해서는 확실한 금융 지원을 통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