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 깨고 벤처型 문화 도입... 이젠 '이재용표 비전' 보여야

    입력 : 2016.05.02 09:25

    ['이재용의 삼성' 2년]


    실리콘밸리式 조직 혁신 추진 "경쟁력 없는 분야는 모두 판다"
    화학·방산부문 매각에 이어 제일기획·금융 계열사 매각說
    신사업 핵심 전자·금융·바이오… 구체적 청사진은 아직 안 보여


    지난 2월부터 삼성그룹 주요 경영진 회의에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엔 이재용(48) 삼성전자 부회장이 회의장에 들어서면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하지만 최근엔 이 부회장이 입장해도 앉은 채로 인사를 나눈다. 긴급한 현안이 있으며, 이메일도 아닌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로 보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럴 땐 '그렇게 하세요'라는 이 부회장의 답문이 역시 문자로 날아온다. 지난 3월엔 이 부회장이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는 모습이 우연히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됐다. 당시 이 부회장은 가방을 직접 끌고 출국 수속을 밟았다. 지난해 9월 삼성 전용기를 모두 매각한 후 일반 여객기를 주로 이용하는 그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수행원 없이 혼자 출장을 다닌다. 재계에선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이 부회장이 스스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2014년 5월 10일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이 부회장이 사실상 삼성을 이끈 지 2년이 되고 있다.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조직 문화 혁신과 화학·방산 부문 매각 등 과감한 사업 재편에 대한 평가는 높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 동력이 안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 미래전략실 고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 투병 2년을 맞아 이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는 등의 형식적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조용한 가운데 삼성의 경쟁력을 높이는 혁신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1등 이외엔 모두 팔 수 있다"


    삼성이 2014년 11월 화학·방산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2015년 10월에 화학 3개 계열사를 롯데그룹에 매각하자, 재계에선 "앞으로 수년간 수익이 날 회사들을 삼성이 헐값에 팔아 치웠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 삼성이 매각한 화학 회사들은 지난해 수천억원씩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 부회장은 주변에 "삼성의 수뇌부 가운데 화학·방산 계열사에 일년에 몇번이라도 가본 사람이 몇 사람이 있는가. 이런 기업을 핵심으로 키우고 싶어하는 그룹에 매각하는 게 직원들을 위해서도 낫다. 비싸게 팔 생각은 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한 기업이 어려우면 다른 기업이 돕는 방식의 그룹 경영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이 없는 분야는 뭐든지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고 했다. 그동안 삼성에 대한 '문어발식 확장' '선단식 경영'이라는 비판을 이 부회장이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제일기획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금융 일부 계열사는 물론 삼성전자 내 비핵심 사업부 매각설까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격식 없애고 벤처형 문화로


    이 부회장의 경영 철학은 실용주의·책임경영·현장주의이다. 이 회장이 쓰러진 후, 이 부회장의 첫 외부 공개행사는 지난해 6월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 대처가 미흡했음을 사과하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 참모들은 공개 사과를 건의하면서, 이 부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직접 내가 사과하는 것이 맞다"며 주저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또 올해는 매년 신라호텔에서 주요 임직원을 불러 치르던 신년 하례회를 생략한 채 곧바로 삼성전자의 경기 용인 기흥사업장과 수원 디지털시티 등 현장을 찾아 업무 보고를 받는 것으로 대신했다. 최근엔 정기 인사 기간이 아닌데도 2700억원대 적자를 낸 박동건 삼성디스플레이 사장을 전격 교체했는데, 이 역시 이 부회장의 '책임 경영'의 일단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의 사업 포트폴리오 핵심은 전자·금융·바이오의 세 축이다. 전자 분야에선 각 계열사와 사업부 간의 통폐합과 벤처 기업의 인수를 통해 속도를 내고 있지만, 금융과 바이오에선 아직 구체적 청사진이 안 보인다는 평가다. 바이오는 지난해 12월 인천 송도에 바이오 의약품을 생산할 제3공장을 착공했지만, 신약 개발이 아닌 바이오 의약품 양산이란 공정 기술만 가지고 있다. 금융은 카드·증권사 매각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삼성생명의 금융지주사 전환설이 나도는 등 불확실성이 여전하다.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이 부회장이 선제적 구조조정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사업을 여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