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비藥 온라인 판매 규제... 해외 직구 나서는 소비자

    입력 : 2016.04.25 11:58

    [인터넷 판매 제한에 소비자 불편, 관련 산업 성장도 막아]


    약품 오·남용 막는다는 이유로 모든 약품 온라인 판매 불허
    美·日 등은 온라인 구매 일상화
    해외 직구 20%가 의약·건강식품, 외국 온라인약국 한국어 서비스도
    콘택트렌즈·선글라스까지 규제 "업계 이익 위해 소비자 편익 뒷전"


    두통·생리통에 시달릴 때마다 타이레놀을 사먹는 직장인 김모(34)씨는 최근 인터넷으로 타이레놀을 미리 사두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밤늦게 약이 떨어지면 문을 연 약국을 찾는 일이 힘든데다,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 인터넷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어서 마음먹고 검색을 해봤는데, 국내에서는 어떤 약품도 온라인으로 팔 수 없다는 규제가 있었다. 김씨는 "동네 편의점에서도 파는 상비약을 온라인으로 팔면 안 된다는 건 황당한 일 아니냐"고 했다.


    와인 등 주류(酒類)의 택배 판매를 둘러싸고 불법 논란이 일었지만, 주류 외에도 판매 채널이 규제되는 품목이 다수 있다. 특히 의약품, 안경, 콘택트렌즈 등은 '국민 건강상의 안전'을 이유로 온라인 판매가 막혀 있어 시대착오적인 규제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의약·온라인 쇼핑·물류 등 관련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편의점에서 파는 감기약 인터넷 판매는 불법


    약사법에서는 의약품을 약사가 약국 안에서만 팔도록 규정한다. 지나친 규제라는 비판이 거세자, 보건복지부는 2012년부터 두통약·감기약·해열제 등 13가지 상비약은 편의점에서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상비약을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팔지 못한다. 명분은 약품 오·남용을 막는다는 것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약은 약사가 팔아야 한다. 편의점에서 상비약 판매를 허용한 건 약국이 문을 닫았을 때를 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에 가로막힌 사이 외국 쇼핑몰에서 약품을 '해외 직구(직접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2014년 해외 직구 물품 중 의약품 및 건강기능식품 비중이 20.7%에 달했다. 인터넷 쇼핑몰 업체 임원은 "규제로 국내 시장을 못 키우는 사이 해외 업체만 손쉽게 장사한다"고 말했다. 일부 해외 온라인약국은 한국어서비스를 제공할 정도다.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국민 건강은 명분일 뿐 의약계는 온라인에서 약을 팔면 가격이 저렴해져 수익성이 낮아진다는 점을 우려해 규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해외 사례를 보면 복지부의 '인터넷 판매불가 방침'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 중국 등에서는 온라인으로 약을 사는 게 일상화돼 있다. 미국은 드러그스토어(drug store)에서 파는 약 1만종의 약품을 거의 그대로 온라인에서 구매 가능하다.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eBay)에서 'Tylenol(타이레놀)'을 검색했더니, 크기·형태·가격별로 무려 485가지 상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일본도 다음 달부터 일본우정그룹 산하 택배업체인 일본우편이 조제약을 집으로 배달하는 서비스를 개시한다. 2013년 일반의약품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한데 이어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일본은 작년 연말 드론으로 약을 배달하겠다는 계획을 정부 차원에서 내놓았다. 중국만 하더라도 작년 온라인 의약품 시장이 400억위안(약 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코트라는 추산한다.


    국내에서도 일부 약국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손님이 원하면 약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본지가 서울시내 약국들에 문의한 결과 "택배비를 부담하겠다"며 배달에 적극적인 약국이 있었다. 약사들 스스로 규제를 유명무실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규제 개선과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약품의 온라인 판매를 허용해달라며 수년째 요구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의약품 온라인 판매 여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경·콘택트렌즈 인터넷 구매 막히자 해외 직구로 눈 돌려


    국내에서는 의료기사법에 근거해 도수가 들어간 안경, 콘택트렌즈, 선글라스를 인터넷으로 살 수 없게 돼 있다. 시력 보호를 위해 전문가와 직접 상담을 한 뒤에 구입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업계 이익 보호를 위한 규제이며 소비자 편익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많다. 더구나 콘택트렌즈는 없던 규제를 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콘택트렌즈는 원래 인터넷에서 팔던 물품이지만 청소년이 컬러 렌즈를 오·남용한다는 논란이 불거지자 2012년부터 온라인 판매를 전부 금지했다.


    온라인 판매가 안 되다 보니 소비자들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른다. 한국소비자연맹이 국내외 콘택트렌즈 판매 가격을 비교해보니 같은 물품도 최소 2%에서 최대 64%까지 국내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소비자단체들은 "미국, 유럽에서 생산된 콘택트렌즈가 FTA(자유무역협정) 발효 이후 관세가 인하됐는데도 소비자들에게 가격 인하 혜택이 안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다 보니 일부 소비자는 콘택트렌즈 역시 해외 직구로 구매한다. 미래창조과학부는 2014년 도수가 있는 안경이나 물안경, 콘택트렌즈 등의 인터넷 판매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대한안경사협회가 성명서를 내는 등 반대하자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안경점은 암암리에 콘택트렌즈를 택배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객을 끌기 위해서다. 본지가 서울 시내 안경점들에 문의한 결과, 여러 곳에서 "본인 도수만 얘기하면 맞는 제품을 골라 보내준다"는 답을 들었다. 인터넷 쇼핑몰업체 관계자는 "스스로 ‘불법 판매’를 하는 약사, 안경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규제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는 온라인 약품 판매 허용 등을 놓고 논의 중이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차영환 기재부 정책조정국장은 "소비자들의 후생을 증대시키고 관련 서비스 산업을 키우기 위해 인터넷으로 많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제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