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 대신 영어 이름 부르고... 출퇴근은 각자 알아서

    입력 : 2016.04.14 09:21

    [조직 쇄신 선언한 삼성의 社內 벤처 육성프로그램 'C랩' 가보니]


    실리콘밸리식 조직 모델 도입
    임·직원 투표에서 채택되면 제안자에게 팀원 선발권 부여
    1년간 독립된 회사처럼 운영… 117개 과제 중 68%가 사업화


    "데이비드, 4분의 3박자 마디 구분 작업은 오늘 중엔 어려울 것 같아요. 시간 좀 더 주세요."


    "어, 안 되는데…. 그래도 이번 주 안에는 끝내도록 해주세요, 브라이언."


    영어 이름이 브라이언인 7년 차 가기환 연구원이 1년 후배인 최병익(영어 이름 데이비드) 연구원에게 존칭으로 '부탁'했고, 후배는 조속한 처리를 '지시'했다.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우면동 삼성R&D(연구개발)캠퍼스 C동 7층에서 남녀 연구원 6명이 화이트보드를 둘러싸고 스탠딩 회의를 하면서 나온 대화다. 3년 차 일반 연구원부터 17년 차 수석연구원까지,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다양한 연차·연령으로 구성된 이들은 서로를 직위 없이 영어 이름만으로 불렀다. 리더 역할은 연공서열로는 6명 중 3번째에 불과한 최병익 선임연구원이 한다.


    이들은 사람이 스마트폰에 대고 콧노래를 부르면 악보가 자동으로 완성되고, 그 악보를 오케스트라·왈츠·록 등 다양한 버전으로 바꿔주는 애플리케이션 '험온'을 개발 중이다.


    책상 위에는 각종 전자장비와 악기, 옷, 찻잔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다른 층에 있는 다른 사무실이 '관리의 삼성'답게 깔끔하게 정돈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삼성 R&D(연구·개발) 캠퍼스에서 스마트폰 악보 앱 '험온'을 개발하는 연구원들이 전자 건반 앞에 모였다. 삼성전자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 'C랩'에 참여한 이들은 3년 차 일반 연구원부터 17년 차 수석 연구원까지 서로를 직위 없이 영어 이름만으로 불렀다. /김연정 객원기자


    7층에는 총 150여개의 좌석이 있었지만, 점심시간이 넘도록 절반도 차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슬리퍼 차림으로 출근하는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은 삼성전자의 사내(社內) 벤처 육성프로그램 'C랩'의 현장이다. 2012년 말 '사내에 창의 문화를 확산하고 실리콘밸리식 조직 혁신 모델을 기존 조직에 접목한다'는 목표를 위해 도입됐다.


    최근 삼성전자가 '스타트업(start-up·신생기업) 삼성 문화 혁신'을 선언하고 조직 쇄신을 준비 중이지만, 비슷한 목표로 만들어진 조직이 3년 전부터 운영돼온 셈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스타트업 삼성'은 여러모로 C랩과 겹친다"며 "C랩이 삼성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삼성'의 미래가 투영된 C랩


    C랩은 삼성전자 직원들이 내부 인터넷망에 제안한 사업·기술·제품 아이디어 가운데 임·직원 투표에서 선택된 것들을 제안자가 실행하는 프로젝트다. 아이디어가 채택된 제안자는 팀원 선발권을 갖는다. 필요한 기술·재능을 가진 팀원 3~5명을 사내에서 자유롭게 뽑을 수 있다. 부서가 달라도, 자신보다 선임이어도 상관없다.


    팀원은 원래 업무에서 완전히 빠지고, 1년간 R&D캠퍼스 또는 수원사업장의 독립된 공간에서 일한다. 독립된 벤처기업처럼 운영되는 것이다. 기존 과장·차장·부장 등의 직급과 부서는 없어지고, '팀장'과 '팀원'만 존재한다.


    심지어 호칭도 팀별로 다르다. 영어 이름만 부르거나, '~씨(氏)'나 '형'으로 통일하거나, 자신들 마음대로 한다. C랩은 출퇴근 시간 가이드라인도 없다. 팀장에게는 정액의 예산과 배정 권한이 주어진다.


    ◇C랩 결과물 68%가 사업화로 이어져


    C랩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단 시작한다. 비만 관리 허리띠를 만드는 '웰트(WELT)' 팀의 경우, 팀을 구성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플라스틱 버클로 만든 1차 시제품을 사내 전시회에 공개하고, 동료들의 조언을 받아 제품을 완성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회사의 원칙은 제품 관련해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C랩은 이런 원칙이 없다"고 말했다.


    1년 기간이 끝나면 팀원들은 포상금만 받고 원래 부서로 돌아가거나 자신들의 결과물을 책임지는 일을 한다.


    C랩에서는 2012년 말부터 이달까지 총 435명이 117개 과제를 추진해, 79개가 완료됐고, 38개는 진행 중이다. 완료된 과제의 경우 46%가 사업부로 기술 이관됐고, 18%가 별도 회사를 꾸려 나갔고, 4%가 즉시 출시됐다. 68%가 실제 사업화된 것이다.


    C랩의 결과물은 글로벌 IT 전시회에서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험온, 웰트를 비롯해 진동을 이용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팔찌형 기기 '팁톡', 가상현실(VR)을 실감 나게 해주는 헤드셋 '엔트림4D' 등이 올해 세계 최대 전자제품 전시회 CES에서 공개됐다.


    김성수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삼성이 빠르게 추격하던 기업에서 선도 기업으로 업그레이드되려면 C랩의 혁신을 그룹 전체로 이어가야 한다"며 "성공에 익숙한 삼성이 실패와 기다림을 얼마나 참아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