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에 몰린 돈 11조달러... 중국 GDP보다 많아

    입력 : 2016.04.12 10:38

    ['파나마 페이퍼스' 사태로 들여다본 조세피난처 실태]


    - 건물 한 곳에 1만9000개 기업이
    카리브해 케이맨제도 세금 없어… 8만여개 글로벌 기업이 '둥지'
    버진아일랜드엔 50만개社 설립
    - '비밀 계좌' 스위스에 돈 많이 몰려
    법인세 높지만 고객정보는 '함구'… 부자·기업들 감시망 피해 절세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는 합법
    기업들 "세계무역 윤활유 역할도"


    중남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케이맨제도의 해변가에 있는 5층짜리 건물 '어그랜드 하우스(Ugland House)'. 이 작은 건물에 주소를 둔 기업이 무려 1만9000개에 육박한다. 이곳은 로펌(법률회사) 메이플 앤드 칼더 소유다. 케이맨제도는 인구 5만명에 불과하지만 8만여 개의 글로벌 기업이 둥지를 틀고 있다. 소득세, 법인세, 양도세가 한 푼도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매년 최소 850달러(약 97만원)만 내면 회사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세금을 아끼려는 글로벌 기업들이 케이맨제도로 몰린다.


    케이맨제도에서 동쪽으로 1700㎞쯤 떨어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도 세금이 없다. 매년 회사 등록비 350달러만 받는다. 이곳은 인구 3만명에 불과하지만, 무려 50만개가 넘는 회사가 설립돼 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정부는 한 해 2억달러(약 2300억원)를 회사 등록비로 걷어 병원을 짓고 크루즈선이 입항하는 부두를 개량한다.



    케이맨제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14위권인 4만7000달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4만4000달러에 달한다. 어업이나 관광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나라들이 조세피난처를 제공한 덕분에 손쉽게 돈을 번다.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파나마 최대 로펌이자 역외회사 거래 업체인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공개한 이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세계의 권력자들과 가족들이 이용했다는 조세피난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세피난처는 케이맨제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처럼 세금이 없는 곳이 대표적이다. 파나마는 해외 소득에 대한 소득세가 없다. 이런 곳에 부자들이나 다국적 기업이 서류상 회사를 만들어 자금을 송금해 놓으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법인세율(12.5%)이 가장 낮은 아일랜드에도 기업들이 찾아든다.


    ◇조세피난처 몰린 돈, 중국 GDP에 맞먹어


    조세피난처에 단순히 세금이 없거나 낮은 것만으로 기업들이 몰려드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영업 비밀이 비밀주의다. 그래서 법인세율이 20%대로 높지만 금융 고객의 비밀을 보장해주는 스위스나 룩셈부르크 등도 조세피난처로 거론된다. 고객 금융 정보를 외부에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부자들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자국 세무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세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조세피난처 등 역외 금융센터에 모인 자금은 전 세계에 11조달러(1경2600조원·2014년)에 달한다. 중국의 연간 국내총생산(10조달러·2014년 기준)에 맞먹는 돈이다. 전 세계 민간 금융 자산(156조달러)의 7%쯤 된다.


    '비밀 계좌'를 만들어 주기로 유명한 스위스(2조7000억달러)에 가장 많다. 이어 아일랜드 등 다른 유럽의 조세피난처에 1조4000억달러, 파나마·케이맨제도 등 카리브해 지역에 1조3000억달러쯤 있다.


    ◇국제 공조로도 없애긴 어려워


    조세피난처는 1980년대 각국이 무역과 외환 거래의 빗장을 풀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세피난처는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각국 정부가 경제 위기 극복에 재정을 쏟아부었다가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세금 새는 구멍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OECD 등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들이 조세피난처를 통해 회피하는 법인세가 매년 1000억~2400억달러에 이른다.


    다국적 기업들은 조세피난처가 세계 무역의 윤활유라고 주장한다. 각국마다 세법과 세율이 다르니 세금 없는 조세피난처에 이익을 모았다가 본국에 한 번만 세금 내는 게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구글이 아일랜드·버뮤다 등 조세피난처에 세운 자회사를 이용해 2007년 이후 해외 온라인 광고에 대해 평균 2.4%의 세금만 낸 것이 드러나면서 이런 주장은 퇴색하고 있다. 그렇다고 조세피난처에 세율 인상을 요구하긴 어렵다. 조세 주권이 있어 간섭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주요국들은 국가별 세율 차이를 이용하는 기업의 행태를 막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각국이 조세피난처를 직접 조사할 권한은 없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조세 정보 교환을 확대하고, 조세피난처 이용을 중개하는 로펌이나 회계법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