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외모의 디자이너였던 나... 머리를 밀었더니, 새 인생 시작됐다

    입력 : 2015.05.13 09:26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의 '삭발'


    고객의 시선 사로잡는 게 없어 첫 프레젠테이션 실패했죠
    그래서 드라마속 디자이너처럼 빡빡 깎았죠, 강렬한 인상 주려


    내모습 본 장모님 "뭔일 있는가", 고객사 임원들도 내 외모에 관심
    "와, 디자인 잘하게 생겼는데!" 그렇게 자신감이 쌓였습니다


    지금은 '배달의민족'이란 배달 앱을 운영하는 벤처기업(우아한형제들)의 대표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나는 한 웹디자인 회사의 신참 팀장이었다. 팀장이다 보니 사업 수주(受注)를 위해 고객사 임원들 앞에서 일명 피티(PT)라고 불리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일이 많았다. 그때의 경험이 풍성한 머리였던 나를 지금의 '까까머리'로, 또 한 기업의 경영자로 이끌었다.


    2004년 봄 어느 날, 나는 한 대기업 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예산 2억원에 달하는 회사 홈페이지 디자인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입사 5년 차 직원이자 29세 팀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웹디자인은 입사 4~5년 차만 돼도 팀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었다.


    "지금 회사가 출시한 새 브랜드에 맞게 홈페이지의 디자인도 바꿔야 합니다." 보름여간 팀원들과 밤을 새우다시피 준비한 자료를 30분가량 발표했다. 팔짱을 끼고 앉은 임원들은 미소 짓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회의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일부는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딴짓을 했다. 전날까지 '디자인이 괜찮은 것 같다'며 연락을 주고받던 대기업의 담당 직원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모두가 어색한 양복을 입은 20대 팀장을 영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어리고 경력도 얼마 안 돼 보이는 사람을 믿어도 되겠느냐'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내게 특출 나게 상대방의 이목을 끄는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프레젠테이션은 실패했다.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배달의 민족'앱을 실행시킨 스마트폰과 배달용 철가방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 대표는 웹디자인 회사 시절 인상적인 외모를 위해 시작한 삭발 스타일을, 창업을 하고 경영자가 된 뒤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머리를 길렀을때 김대표.


    20대 후반의 나이에 빨리 팀장이 된 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한 달에도 여러 번씩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도움이 될까 싶어 TV 드라마의 극 중 디자이너를 눈여겨봤다. 하지만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 여성 디자이너는 성격이 예민하고 화도 잘 내는 소위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남성 디자이너는 자유로운 영혼에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돈도 엄청 많이 버는 사람처럼 묘사됐다. 박봉(薄俸)에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업무에 매달리는 내가 아는 디자이너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또 하나의 특징은 '털'이었다. 드라마 속 디자이너는 머리를 아주 기른 장발(長髮)이거나 아주 짧은 삭발이었다. 염색을 하거나 수염을 기르는 경우도 흔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굉장히 평범한 디자이너였다. 수수한 외모에 어색한 양복, 적당히 기른 머리….


    사실 외모나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를 통해 누군가의 직업, 취향 그리고 실력까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디자이너는 이런 사람'이란 사람들의 편견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삭발을 결심했다. 서울 압구정동의 미용실에 가서 2만원을 주고 "머리를 빡빡 밀어달라"고 했다. '위잉' 소리와 함께 드러난 내 민머리는 너무 낯설었다. 허연 두피가 드러나자 '어디 아픈 사람 같다'는 얘기부터, 장모님도 조심스레 '김 서방, 무슨 일 있는가' 하고 물으셨다. 마침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좋은 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 사람, 평범하지 않구나' '뭔가 크리에이티브(창의적)한 사람이구나' 하는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머리를 깎고 얼마 되지 않아 프레젠테이션이 잡혔다. 고객사의 임원들이 나의 외모에 관심을 갖고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와 김 팀장, 디자인 잘하게 생겼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이전까지는 발표를 하면서 디자이너답게 보이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영어 약자(略字), 감성적인 이야기를 주로 했다. 하지만 머리를 깎은 뒤로는 자연스럽게 농담도 하고 설명도 좀 더 구체적이고 쉽게 했다. 상대방도 훨씬 재밌게 들어주는 것 같았다. 짧게 깎은 머리가 나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회사를 창업한 뒤에도 큰 도움이 됐다. 사람들이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명씩 만나는 투자자들이 '아 저번에 빡빡머리 그 사람' 하는 식으로 날 기억하기 시작했다. 창업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기대감을 갖는데, 솔직히 그런 인상을 주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보통 보름에 한 번씩은 머리를 깎는다. 처음엔 아내와 둘이 신문지 깔고 앉아 한 시간씩 낑낑대면서 잘랐는데 이제는 샤워하면서 5분 내에 혼자 머리를 깎는다. 보름이 안 돼도 중요한 미팅이나 발표, 인터뷰가 있는 날에는 꼭 머리를 자른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긴다.


    10여년 전 웹디자인 회사 팀장 시절 프레젠테이션은 내 삶을 많이 바꿔 놓았다. 지금도 회사 명함에는 '경영자'라는 말 대신 '경영하는 디자이너'라는 문구를 넣는다. 디자이너라는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배달 앱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딸 이름을 딴 글씨체(한나체·주아체)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고, 작년에 독특한 디자인과 광고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것도 다 그 덕분이라 생각한다.


    [김봉진 대표는]


    김봉진(39) 우아한형제들 대표가 운영하는 '배달의민족'은 국내 1위 배달 앱(응용프로그램)이다. 이용자 주위의 짜장면·치킨·족발집 등 배달 업소를 보여주고 스마트폰으로 주문·결제까지 가능한 서비스다. 누적 다운로드가 1700만건, 앱을 통한 월 주문량만 500만건에 달한다.


    벤처업계의 '잘나가는' CEO (최고경영자)지만 본인은 경영자라는 말보다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서울예대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하고 NHN(현 네이버)·네오위즈·이모션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창업했다.


    김 대표는 "디자이너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는 디자이너 CEO가 됐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