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식 국회의원 "20세기가 '상극'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상생'의 시대여야 한다"

    입력 : 2015.02.13 14:22

    18대 총선이 끝난 후, 조정식 의원은 고3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세상의 명예를 얻은 제자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이 세상의 인기라는 것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수녀공동체의 일원임을 먼저 생각하며 언제나 겸손과 온유를 가슴에 두셨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글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국민의 한 사람임을 늘 명심하면서 '겸손'하고 '온유'하길 바라네.' 선생님의 편지는 늘 그의 손에 닿을 책장에 놓여 있다고 한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대략 5백여 명의 사회 명사들을 만나봤지만 늘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담백한 인상'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입지까지 오른 인물의 인상에서는 자신만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문제는 이런 아우라가 자신감을 넘어서 오만과 허세, 혹은 가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면면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인물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기자의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금배지를 달고 표정과 행동부터 달라지는 분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봤고, 비단 개인적 경험에 기대지 않더라도 이런 얘기를 심심치 않게 매체에서 접할 수 있으니 성공인에 대한 공연한 시기나 질투는 아닐 것이다.


    첫 대면에서 느낀 조정식 의원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권력의 기름기가 쪽 빠진' 정치인에 대한 희망을 줄만큼 담백한 인상이었다. 보통 정치권 리더들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이기 마련이다.


    학급에서 반장을 도맡아 하고, 뛰어난 성적과 상적을 자랑하며 리더의 야망과 더불어 그 자질을 다지고 올라오는 인물이 대다수이다. 한마디로 요즘 시쳇말로 '스펙'이 월등하다. 반면 조정식 의원은 너무도 평범한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재수를 통해서 대학을 입학했다. 주인공보다는 주변인의 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낮은 자세로 세상을 마주하는 습관이 생긴 샘이다.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며 대학을 마치고 4년간이나 노동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과 살을 맞대고 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지금도 고교 동문 친구들은 제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랄 정도죠. 튀는 학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우등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무리에 섞여서 조용히 학창시절을 보내는 대다수의 일반 학생 중 하나였죠. 그러다가 격동의 80년, 우연히 대학생들의 시위행렬을 보며 내 마음 속에 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서울 혜화동의 동성고 3학년이던 1980년,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을 때면 당시 대학로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등 주변 학교의 대학생들이 집결하여 시위를 하기 위해 행진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대학생 형, 누나들이 저렇게 분노하고 있을까?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어린 시절의 순수한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대학교 입학 직후, 이러한 의문은 날카로운 현실의 대답으로 다가왔다.


    시대의 부름에 몸을 맡기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현실은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복경찰이 교내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젊은이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그와는 극명하게 배치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고뇌하며,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고교시절 시위 행렬을 보며 느꼈던 의문점은 이내 자유의지와 삶의 성찰에 대한 인간 본연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조 의원은 '인간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하여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서클활동에 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간연구회'는 연세대 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클이자 가장 유명한 학생운동 서클이었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맞이한 5월, 우연한 기회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독재 타도 시위 현장에 있었던 그는 의도치 않게 경찰에 연행되며 난생 처음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시위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주변에서 시위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께 휩쓸려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무혐의로 훈방되었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그가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고 투신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학문의 전당에서 경찰들이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시국 관련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을 구속하는 현실을 보며 더 이상 방관자적 입장으로 젊음을 허비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의지만 가지고는 극복해 나가야 할 현실의 장벽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는 시위를 주동하는 것은 물론, 동참만 하더라도 곧바로 감옥에 가야 하는 시국이었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투쟁을 위해 자신의 젊은 날을 투신해야 할지 아니면 학업에 매진하여 일반적인 사회인으로서의 길을 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식 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함께 고민하던 친한 친구가 학생운동의 길을 선택하고 같이 갈 것을 제안했다. 함께 고민하자고 약속하고 친구와 헤어진 뒤, 그는 뜻밖에 비보를 접하게 된다. 마음의 결정을 굳히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그 친구가 물에 빠진 동생을 구하려다가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해 보였다. 먼저 간 친구가 못다 이룬 목표를 자신이 이행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1984년 민정당사 점거 농성사건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시위의 주동자로 지속적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지만 군대냐 감옥이냐의 심각한 기로에서 결국 군입대를 하게 되며 그의 학생운동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던 ‘타는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총선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 사회구조나 민중의 생활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불평등과 약자의 설움은 여전했다. 그는 다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에게 눈길을 돌려 노동현장으로 가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학 졸업 후 노동현장에서 4년이란 기간을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울고 웃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다. 노동자들이 직접 겪고 있는 삶의 현실과 직결되는 생존권과 인권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희망을 줘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생겼다.



    정치 인생의 표상


    4년간의 노동운동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2년 조정식 의원은 민주당 당무기획실 전문위원으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실질적인 민주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 입문 직후 14대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며 냉혹한 정치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시련으로 시작한 정치 인생은 1993년 인생의 멘토 제정구 의원을 만나며 오히려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제정구 의원은 '깨끗한 정치선언'을 주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1993년 3월 제정구 의원을 처음 만나 6년을 함께 가까이 모시며 살았습니다. 제정구 의원은 제게 정치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14대 대선과 15대 대선의 연이은 실패와 함께 일하던 당직자들의 해산은 조정식 의원을 피치로 몰았다. 하지만 제정구 의원은 그가 변화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정치판에 대한 좌절감에 포기하려 할 때면 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제정구 의원은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큰 병을 얻게 되었고, 제정구 의원이 투병 중이던 시기에 조정식 의원의 딸 역시 소아암 투병 생활을 했다. 조정식 의원의 딸은 제정구 의원과 같은 병원에 병실을 마주보고 있게 되었다. 제정구 의원은 1999년 2월 끝내 별세했고 10개월 뒤인 12월, 조정식 의원은 사랑하는 딸 수연이 마저 보내야만 했다. 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며 세상과의 작별 전, 아이를 위해서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로 천주교 영세를 받도록 해주었다. 딸아이의 작은 머리 위에는 하얀 면사포 대신 하얀 티슈를 얹어졌고, 영세는 병실 한쪽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조정식 의원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내 영혼의 절반과 육신의 절반을 잃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곤 했다. 아버지로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말로 표현 못할 참담함이 그를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으로 몰고 갔다. 정신적 스승을 보내며 거대한 운명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보잘것없는 자신이 스승의 큰 그 뜻을 따라 제대로 된 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고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반성과 고뇌는 지금의 조정식 의원을 만들었고, 이전투구와 같이 거친 정치판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초심을 지키도록 그의 마음 속을 조용히 밝히고 있는 촛불이 되었다.


    이후 조정식 의원은 17, 18, 19대 3선의원이 되었다. 현재 국회에서 3선의원은 총 국회의원수의 30%가 되지 않는다.


    18대 총선이 끝난 후, 조정식 의원은 고3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세상의 명예를 얻은 제자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이 세상의 인기라는 것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수녀공동체의 일원임을 먼저 생각하며 언제나 겸손과 온유를 가슴에 두셨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글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국민의 한 사람임을 늘 명심하면서 '겸손'하고 '온유'하길 바라네.'


    선생님의 편지는 늘 그의 손에 닿을 책장에 놓여 있다고 한다.



    꿈과 희망을 부르는 상생과 대통합


    현재 조정식 의원은 지난 2013년 기획재정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최근 대한민국의 이슈는 역시 경제민주화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가의 재정, 예산, 국민 실생활과 직결되는 일자리, 복지, 세금문제까지 주요 경제 정책 현안들을 다루고 결정하는 곳이다. 나라 살림살이의 중추를 맡고 있는 샘이다.


    "국회의원을 고급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4년에 한번씩 국민의 엄중한 평가를 받는 자리죠. 국회의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국회 내부에서부터 바뀌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자신도 과거와 같이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라는 인식이 사라졌습니다. 저 역시 좋은 정치를 통해서 제대로 평가 받고 다시 선거를 통해 인정받는 과정에서 보람을 찾으려 합니다. 3선의원으로서 막중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의정활동 동안 환경노동위원회, 국토해양위원회, 산업자원위원회 등을 거치며 실물 경제를 다뤄왔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 정책과 거시경제를 다루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경제 현안과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담당하고 있는 중요 쟁점 중 하나는 조세 체제에 대한 개혁 과제를 점검하고 제도화시킬 수 있는 중장기 개혁안을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그는 조세개혁특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국세가 11개, 지방세가 14개, 총 25개 항목으로 조세체계가 구성되어 있는데 상당히 방만하고 복잡합니다. 조세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는 특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요즘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부익부빈익빈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죠. 양극화 해소를 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 확보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세금입니다. 결국 이는 경제민주화와도 직결되는 문제죠. 조세개혁을 통해 현재 대기업이나 재벌에 편중되어 있는 비과세 감면이나 조세 불균형에 대한 문제를 해소하고 이를 통해서 서민 경제 활성화와 서민 복지에 쓸 수 있는 제반을 확보하는 것이 조세개혁특별위원회에서 해야 할 일들입니다."


    조세개혁특위가 구성된 이후에 여야의 내로라하는 경제통들이 모였다. 이미 몇 차례 조율을 했고 6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야의 입장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조 의원의 말이다.


    "대기업이나 재벌총수 일가들의 불법, 탈법적인 자금 은닉이나 외국 조세피난처를 통한 비자금 조성 현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세청에서도 철저히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세청은 기획재정부 관할입니다. 대기업이나 재벌총수를 무작정 제재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조세 정의를 실현하고, 걷은 세금에 대해서는 사회에 환원시킴으로써 서로 상생하자는 얘기입니다. 대기업도 정당하게 자신이 낼 것은 내고, 중소기업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비즈니스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면 됩니다. 그래야 대기업, 재벌총수부터 서민까지 함께 상생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불신과 분열이 너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완화시키고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이 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악화되면 당연히 대기업과 재벌도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같이 한발씩 양보해서 상생하고 윈-윈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궁극적인 취지라고 보면 됩니다."



    개천용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의 절실함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양극화와 그에 따른 문제 인식으로 넘어간다. 그는 개천용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거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이를 이루었던 어른들의 사례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인재의 잠재력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는 얘기다. 다만 현실의 환경이 개천용의 탄생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언제부터인가 성장의 사다리가 끊겼습니다. 과거에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노력하고 공을 들여서 자수성가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었고, 이는 곧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또 다른 젊은이들의 살아있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시작점이 다른 상대와의 경쟁에서는 뒤쳐지게 되었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세태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없음은 큰 문제입니다."


    조 의원은 개천용이 나오기 위한 환경적 변화가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상생과 대통합의 정신'이 절실하다고 한다. 이는 비단 정치판에만 필요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처한 현실이 암울할수록 상생과 대통합은 국가 미래 발전의 중대한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한다.


    "개천용의 잠재력을 가진 어린 학생들, 젊은이들, 중소기업의 인재들이 그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편향된 발전으로는 해답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과 가능성을 발굴해주는 사회적 안전장치와 시스템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울타리는 과거 코리안 드림을 이룩한 선배들이 그랬듯 예비 개천용들에게 명확한 목표의식과 희망을 줄 것입니다."


    개천용의 롤 모델이 될만한 성공한 정치인으로서의 조언보다는,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선배로서의 미안함이 느껴졌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반드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한 사회나 국가가 유지되려면 그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고, 조금 모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재벌도 있고 촌부도 있죠. 다 잘난 사람만 모여서는 절대 국가가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이런 다양한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것이고, 국가의 지도자나 정치인의 역할은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키우며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조금 많이 가진 사람이 배려하고 조금 못 가진 사람도 희망을 가지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국가관이고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예비 개천용들이 개천용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대통합과 상생의 국정이 필요합니다."


    조정식 의원 인생의 롤 모델인 제정구 의원은 생전 연설에서 "20세기가 상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상생의 시대"라고 했다. 그는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뜻에 따라 가고자 한다.


    출처 및 기사 링크
    리더피아 www.leaderp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