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에 수표 입금…입급내역 기록 안돼"

은행 측 “기기 오류 아니다”

ATM 제조업체 “오작동 발생 가능”

직장인 이모(32)씨는 지난 추석 연휴에 신한은행의 한 지점에서 10만원권 수표를 입금하려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ATM기를 통해 입금을 하고 통장을 확인해보니 입금 내역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이 씨는 비상전화를 통해 은행 측에 곧바로 사고 신고를 했다. 하지만 은행 직원은 “ATM기 입출금 기록과 잔고 확인 후 연락해주겠다”는 말만 할 뿐 사고 발생 후 이틀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은행 측 “고객 부주의로 사고 발생”
이씨는 수 차례 항의 끝에 돈을 돌려받았지만 이틀 동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은행 측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은 듣지 못한 이씨는 지점을 방문해 “10만원권 수표를 분명히 입금했는데 인터넷뱅킹으로도 확인 안 됐다”며 ATM 오작동 가능성을 물었다. 지점 직원은 “고객 실수로 버튼을 잘못 누룰 순 있지만ATM의 오류는 있을 수 없다”면서도 ”입금 오류가 발생하면 수표가 반환되는 게 맞지만 수표가 이미 수표통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자동화기기 제조업체의 설명은 다르다. ATM기 노후로 전산장애가 일어날 수 있고 지폐나 거래명세표가 기기 내부에 걸리면 오작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한 ATM기 제조업체 관계자는 “지폐를 입금하는 도중에 기계가 중간에 서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며 “지폐가 ATM로 투입된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기기 내부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 기계 통신이 끊어지거나, 돈은 기계 안에 들어가 있는데 입금처리가 안 되는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 ATM 하루 400여대 고장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9개 은행의 최근 3년간 ATM기 고장건수는 일평균 400여 건이 넘는다. 특히 ATM기 오작동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민원은 지난해 30여건, 올해 7월까지 총 11건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됐다. 자동화기기의 오작동 관련 사연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도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출금액이 부족하다거나 반대로 현금이 과다 인출되는 사고 등 사연도 가지가지.

실제로 최근 한 단위 농협 CD기 즉,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이 과다 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객이 만원을 인출하려 했지만 5만원 권이 지급된 것이다. CD기에는 ATM기와 달리 출금할 때 지폐를 확인할 수 있는 검증센서가 없다.

따라서 일일이 현금통에 지폐를 투입하게 되는데 직원이 만원 권 현금통에 5만원 권을 잘못 넣어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농협 측의 설명이다. 농협 관계자는 “기기 오류에 의한 사고라기보다는 직원이 실수로 만원 권을 넣어야 되는 CD기 현금 박스에 5만원 권을 잘못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자동화기기 오작동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은행들이 원인을 파악하기보단 사실을 덮기에 급급하단 것. 은행들은 사고가 접수될 경우 해당 지점에 사실 확인을 지시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용자의 착오나 실수로 간주해 버린다. 지폐가 덜 인출되더라도 증인이 없거나 CCTV 영상과 같은 특별한 증거가 없으면 피해자들은 해당 은행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금감원 분쟁조정 ‘유명무실’
오작동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기 위한 수단으로 금감원에 민원을 내는 방법이 있지만 분쟁조정절차를 밟게 될 뿐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

이와 관련해 서영경 YMCA 신용사회운동사무국 팀장은 “ATM기 등 자동화기기 오작동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을 하면 CCTV 영상 등의 증거를 확보하지 않는 이상, 고객 과실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은행과 감독당국이 자동화기기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소비자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개선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동화기기의 납품 과정도 기기 오작동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통상 은행권 IT장비 구매 입찰에선 가격 점수 비중이 20~30%에 달한다. 기술 수준보단 사실상 가격이 입찰 결과를 좌우하는 셈이다. 더욱이 최근 은행들이 각종 비용 절감에 나서면서 지난해 대당 3,000만원을 웃돌던 ATM가격은 최근 2,000만원대 초반까지 하락했다. 납품업체들은 기기 가격이 정상화돼야 품질개선이 이뤄질 수 있단 주장이지만, 상당수 은행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아웃소싱업체에 기기 유지관리를 맡기고 있다.

◆5만원권 유통…”ATM 오작동 우려”
최근에는 5만 원권 지폐가 유통되면서 자동화기기 오작동이 상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5만원 권 위조방지를 위해 적용된 은선과 종이 사이가 뜨는 이른바 ‘벌어짐 현상’이 ATM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위조방지 효과를 내기 위해 은색 선에 접착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지, 제작상의 오류는 아니란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승윤 한국은행 발권국 부국장은 “일부에서 은선 문제를 제기해서 모든 기기에 대해서 테스트를 해 봤지만, 벌어짐 현상이 있더라도 ATM을 이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국내 ATM기의 특성을 간과한 것이다. 현재 시중에 깔려 있는 ATM은 이른바 ‘환류 방식’으로 화폐를 입출금시킨다. 예를 들어 고객이 10만원을 ATM에 입금하면 입금된 돈이 그대로 기기 안에 저장돼 있다가 다시 인출된다.

오랜 사용으로 벌어진 공간이 커지면 지폐가 훼손되고 결국 오작동을 초래할 수 있단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화기기 제조업체의 한 관계자는 “화폐의 훼손 정도가 심하다면 자동화기기 오류는 당연히 발생할 수 있다”며 “5만원 권이 유통된 후 2~3년 정도 경과하면 ATM가 오작동 발생이 급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김자혜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총장은 “자동화기기 오작동으로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방지위해 은행들이 기기결함을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노후기기는 교체할 필요가 있다”며 “소비자 역시 ATM기 이용시, 지폐 상태를 꼼꼼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엔 현재 5만여 대가 넘는 자동화기기가 설치돼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유지보수와 오작동 원인 파악 등은 뒷전으로 밀리면서 자동화기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비즈니스&] 이기주 기자 2kafka@chosun.com